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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8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정치참여의 언어
정치/사회2013. 12. 18. 02:05



연일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대자보란 것이 워낙에 대학가에서만 향유되던 문화이니만큼 초창기에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만 돌다 끝나겠지 하며 찻잔속 태풍일거란 예측들도 있었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날이 지나면 지날 수록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는 대학문을 넘어 초중고생들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호응을 얻으며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건 아닌데'하면서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만큼 "결코 안녕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대자보를 통한 발언이 정치선동이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뭐하는거냐는 지극히 꼰대스러운 반응들도 줄지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게 된다면 단명할 움직임이라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한심한 것은 대자보 문화의 하나인 반박대자보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의 목소리를 비판하기 보다는 대자보를 훼손하거나 철거하는 등의 사보타주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혹여나 있더라도 그들의 발언이 부당함을 입증하는 목소리보다 정부여당의 발언을 카피한 것들이 주류기에 반향은 그다지 없을 수 밖에 없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세상이란 연못에 돌을 던진 후 일어난 파문은 최초로 대자보를 쓴 주현우 학우의 말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임에 분명하다. 주현우 학우는 "시험기간에 일어난 철도노조대량해고사태에 참을 수 없어 취업준비생임에도 불구하고 대자보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주현우 학우의 대자보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이들에게 호응을 하고 있는걸까. 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개별단위의 사회참여운동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이 현상의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는 걸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대자보에 쓰여진 언어가 이제까지 우리가 보고 들어왔던 것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고려대학교 경영08학번 주현우 학우의 대자보





대자보에 대하여 


 대자보는 지금처럼 인터넷과 SNS라는 정보공유의 시스템이 없었던 과거 시절에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을 하기 위해 사용한 벽보 형식의 매개체다. 개인별로 전달되는 정보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의 벽에 고정하여 전달하므로 인력과 자본이 많이 필요없는 가장 효율적인 의견 전달의 수단이었다.


그 양식은 간단하다. 비싼 돈을 주고 대량으로 인쇄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A0사이즈의 전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논지를 일일이 손으로 써내려갔다. 당연히 손글씨 실력 여부에 따라 가독성이 천차만별이었다. 이후 컴퓨터와 개인용프린터가 공급되고 나서야 전지에 인쇄된 문구를 붙여 게재하는 양식으로 발전되었고 오늘날에 이른다. 


보통 대자보에 적히는 말들은 천차만별이지만 대체로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를 정리하고 구호를 외치는 방식이다. 가령 부당하게 해고되었다면 해고된 경위와 과정을 고하고 사측의 부당한 조치를 규탄하고 해결하라는 '외침'으로 마무리 되는게 보통이다.


읽는 이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동참하자는 호소가 주를 이루는 대자보의 언어는 일각에서는 '운동권 언어'로 부르기도 한다. 대자보 문화가 사회참여를 주로하는 운동권에 의해 주로 향유되었기에 이러한 말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에 사용된 언어가 단지 '운동권'에 의해서만 사용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운동권에 의해 사용된다고 하는 단어들, 가령 '규탄한다', '물러가라', '사퇴하라' 등의 말들은 정치인들에 의해 더욱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대자보의 언어와 내용, 쓰는 주체의 다양성과 이용자의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자보는 한동안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매체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남의 일보다는 개인사에 치중하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 - 특히 IMF시절 이후로 개인이나 가족 신변 외에는 무관심한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대자보를 비롯한 사회참여의 목소리는 힘을 잃게 된다. 그 위에 사회참여를 억제해야 할 이유가 있는 이해관계자, 단체들은 이들의 메시지가 전달되기 힘들도록 대자보를 붙일 공간을 폐쇄하거나 지속적으로 사보타주를 하고, 목소리를 내는 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 억압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이에 일조한다. 




'여러분은 안녕들 하십니까': 질문의 위대함 


그런데 "안녕들하십니까"에 쓰여진 대자보는 다르다. 주현우 학우의 대자보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너는 그래도 괜찮느냐'며 읽는 이에게 화두를 던지며 사회적 차원의 이슈를 개인의 이슈로 전환시켜 주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개인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며 개인의 인간성, 상식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 전혀 옳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는 과거에 씌여진 대자보들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과거의 대자보들은 읽는 자들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말들로 가득했다. 이러이러한 일들이 발생했으니 너도 동참하라는 식이었다. 사회참여가 활발했던 과거였다면, 대자보에 쏟아부을 시간적 여유가 넉넉한 시대였다면 몰랐을까 지금은 굳이 대자보가 붙는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더욱 읽는 이로 흥미와 사고의 여지를 주지 않는 글에는 오죽하랴.


하지만 전지 두 장에 쓰여진 언어는 이제까지의 대자보의 언어들과는 차별된 고유한 언어였다. 사회 부조리에 대해 지적을 하는 점은 동일했지만. 문제점을 단순히 규탄하거나 함께 동참해 막아야 한다는 식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사람이 죽어가고, 대량해고를 당하고,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침묵'해야만 하는 세대를 향해 과연 '안녕들 하십니까'라며 질문을 던짐으로써 읽는 이들로 생각하게 했다.


생각은 판단을 이끌고 또 대답을 불러 일으킨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주현우 학우의 언어는 이제까지 침묵을 지켜왔던 대학 지성인들로 하여금 일제히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로 화답하게끔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지금도 대자보는 계속해서 붙고 있으며 그 영역 또한 비단 학교뿐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나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고백과 회개의 언어



고백과 회개라는 단어를 써서 조금 불편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점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안녕들하십니까"의 대자보에 대한 답변 대자보들은 모두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며 이제까지 자신들이 어떻게 사회문제에 침묵해왔는지 고백하며 또 다른이들에게 안녕을 묻는 내용들이다. 


이는 기독교의 고백과 회개의 언어와 유사성이 깊다. 자신이 이제까지 저질러왔던 잘못에 대한 자각과 돌이킴을 주제로 하는 회개는 개인이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가운데 이뤄진다. 기독교에서는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해, 불교에서는 선각자들이 던지는 화두를 통해 개별 신도들의 인식을 전환시킨다. 주현우 학우의 대자보 글은 마치 '사회의 회개운동'과도 같다. 사회부조리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괜찮은 척 지냈던 한 사람이 괜찮지 않다고 고백하는 글에 다들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함께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대자보에 적어 내려간다. 


고백의 언어는 매우 강력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대자보가 실명으로 게재되는 만큼 신뢰성면에서도 여느 권위자의 글보다도 힘이 있다. 사람들은 주현우 학우의 대자보 이후 게재된 대답하는 대자보들의 내용에 더욱 열광하고 성원을 보내고 있다. 대전에서 올라온 60세 노인의 응원의 글, 82학번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글, 학교청소노동자들의 미안하다는 글이 계속해서 게재되고 있다. "안녕들하십니까"의 진정한 힘은 "나는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대답하는 목소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SNS를 통한 대자보 확산


과거의 대자보 문화와 지금이 다른 점은 바로 인터넷과 SNS를 통한 대자보 내용의 확산이다. 대자보는 정해진 지역의 벽에 일정시간 붙는 양식이므로 시공간적 제약을 받는 매체다. 그러나 인터넷과 SNS를 통해 해당 내용들이 사진으로 찍혀 이용자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있다.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굳이 대자보를 보기 위해 학교를 방문하지 않아도 인터넷이 되는 PC와 모바일기기를 가지고 있다면 어디서든 동일한 내용을 왜곡없이 확인할 수 있다. 최초 고려대학교 정경문에서 시작된 확산의 분위기는 채 며칠도 되지 않아 전국의 학교에서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은 해외 대학의 학생들도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가장 혁신적인 부분을 지적하자면 주현우 학생의 대자보가 바이럴하게 퍼지자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페이스북에 '안녕들하십니까'라는 페이지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행동을 매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 학생운동이 하향식으로 조직되고 명령되는 체계였다면 이들의 움직임은 철저히 상향식이었다. 


페이지를 제작한 이들은 결코 페이지에 가입한 이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자발적인 동참, 수평적 의사결정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 모임은 '쓰고 싶은 이들은 씁시다'라는 권유 외에는 이렇다할 지시사항 조차도 없다. 그나마 있었다면 지난 14일 첫 오프라인 모임때 고려대학교에서 시청 밀양주민 故유한숙 어르신 분향소 참배 및 서울역 촛불집회참여까지 참여자를 인도하는 정도였을까. 18일 현재 25만6천여명이 가입한 이들 페이지는 여전히 가입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만을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새롭게 표현된 저항의식: 익명이 아닌 실명 내걸은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


오프라인 모임에 모인 그들은 누구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미리 준비해온 피켓으로 자신의 '안녕하지 못함'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정경문에 모인 사람의 규모는 대략 삼백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고려대 학생뿐만 아니라 타 대학 학생과 시민들도 함께 참여했다. 학교 깃발 아래 모이던 전통적 학생운동 방식과는 다르게 이 오프라인 모임은 소위 '번개모임'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굳이 주최측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삼삼오오 공감하는 개인들이 모여 각자 준비해온 것들로 모임을 진행해나갔던 것이다. 


이들이 다함께 모여 불렀던 건 학생운동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민중가요가 아니라 인디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이었다고 한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넌 행복해야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이 노래는 침묵과 순종을 강요받는 세상에 결코 안녕할 수 없는 우리 세대들의 아픔이 담겨있다. 민중가요의 투쟁의 외침을 통해 깃발 아래 집단속 익명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 때문에 상처받고 아픈 '나'라는 주체의식이 있는 이들이 대중가요를 노래하는 것이다. 이는 엄연히 이전 학생운동세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나는 서울역 촛불집회 이후 무대 뒷편에서 있었던 "안녕들하십니까"의 마무리 모임에 참여했었는데, 최초 모였던 인원과는 다르게 많아야 40여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하고 있었다. 촛불집회를 마지막으로 자발적으로 모임을 마무리한다는 공지대로 집회가 끝나자 많은 이들이 바로 돌아간 것이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시위에 참여해본 일이 없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마무리 모임 내용 자체도 '이후엔 각자 알아서 뒷풀이 하세요'였다. 


이들의 모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것이었다. 누군가가 조직하고 명령하는대로 따라 움직이는 레밍즈같은 집단이 아니었다. 이날 촛불집회에선 주현우 학우가 대표발언을 했는데, 그가 발언한대로 함께 했던 이들은 주현우 학우의 의견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이런 사회 속에서 전혀 안녕할 수 없어서 나온 개인'들이었다. 안녕할 수 없는 이유도 전부 제각기 달랐다. 이제까지의 저항표출은 일정 규모의 집단성을 통해 이뤄졌다면, "안녕들하십니까"의 모임은 모임이면서도 개인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집단 속에서 조금이라도 다를 수 있는 의견이 묵살되지 않고 그대로 표출될 수 있는 다수 개인의 발언장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안녕들하십니까"란 모임이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조직으로 발전될 것이냐는 분석들도 꽤나 보였었는데, 이들의 모임이야 말로 디지털세대들의 새로운 저항표출의 방식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공감'을 매개로 하여 '개인'이 살아있는 느슨한 모임을 통해서도 충분히 사회에 영향력 있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본다. 그리고 그 생명력도 '개인'들이 개인적 동기를 지니고 있는 한 상당히 긴 시간 지속될 수 있다. 굳이 주최자, 리더십이라고 할 사람이 없이 모임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리더이자 주최자이기 때문에 기존 운동집단들보다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안녕들하십니까"의 움직임이 기존의 사회운동과 결합되었을 때 미치는 파장력은 상당하다. "안녕들하십니까"에 동조하는 시민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그리고 이들 개개인이 생각하는 '문제' 또한 사회영역 전반에 걸쳐있다. 그렇기에 특정 방향성을 지닌 이익집단과는 달리 이들의 소소한 지지는 어느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현재 박근혜정부의 철도민영화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철도노조의 파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철도노조의 파업은 정부의 지도부 구속결정 등 전방위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 기운을 잃지 않고 장시간 지속되고 있다. 17일 jTBC9시뉴스 설문조사결과는 52%이상의 참여자들이 철도노조지도부 구속에 대한 부정적 의견과 파업지지의 의견을 내비쳤다.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집단의 이름으로 불려졌지만, 현실에서는 대체로 개인들의 실명으로 게재된 대자보들이 본질이다. 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호소가 아니라 개인의 실명을 내건 개별적인 문제의식의 발현이며 실천이다. 개인의 익명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의견을 개진하는 용기와 지식인으로서의 참여의식은 이들의 대자보 사진과 SNS를 통한 공유로 세상이란 연못에 더욱 큰 파도을 일으킬 것이다. 




진정한 참여민주주의의 시작


나는 이러한 대자보를 통한 사회참여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기존 정치권과 제도를 통해서는 상향식 의견수렴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만큼 이들의 질문과 고백의 릴레이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소중하다. 


여대야소상황과 권위주의 시대를 능가하는 박근혜 정부의 통치가 펼쳐진 1년이다. 새누리당과 정부는 자신들의 지지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정부여당의 정책으로 야기된 부조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모조리 종북으로 몰리는 현실 가운데 함께 싸워줄 야당은 없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활동결과는 결국 새누리당2중대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정도로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부정선거규탄과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 쌍용자동차문제, 밀양과 제주강정문제해결 등등 이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에 민주당은 거의 응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당내문제와 내년 지방선거에서 현상유지를 해볼까 하는 꼼수만 가득해 보인다. 대통령사퇴발언을 한 장하나 의원에 대한 당내 징계적 처분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이뤄진 민주당의 실정의 대표적 사례다. 다른 한 편 생길거라고 예고만 하고 있는 안철수의 새 정당은 어부지리를 노리는 듯 양비론적 발언만 지속하고 있다. 


결국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집단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안녕들하십니까"의 외침과 이에 대한 지지는 정치권을 변화시키는 촉매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이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정치인들이 하나 둘 용기를 얻고 현정권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후보, 전 복지부장관인 유시민 의원, 전 통일부장관 정동영등 대선패배이후 침묵을 지키던 이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1년간 박근혜의 반대편에 섰던 48%의 국민들의 목소리가 철저히 억압되는 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여러 방향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더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겠다고, 침묵하며 혼자서 앓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름없는 개인들의 영향력이 기존 사회운동과 정치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은 분명하다. 주현우 학우가 촛불집회때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사회를 바꾸는 건 시간 문제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던 청년들의 아픔을 스스로 돌보기 시작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기성세대화된 40~60대의 6월혁명세대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너희를 아프게 했던 건 우리의 침묵이었다'라고 고백한 한 누리꾼의 말처럼 많은 기성세대들이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있다. 


정치는 어려운게 아니다. 정치참여는 더더욱 어려운게 아니다. 선택이 계속되는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정치이다. 정치가 나쁜 것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 쉽게 상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견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청년의 질문과 수많은 시민의 고백의 대답이 큰 물결을 이루는 지금, 정치는 바른 길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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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osted by Cyberc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