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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02 존중이 없는 사회
Thoughts2013. 4. 2. 21:29
오후 4시 50분 잠실역 방향 2호선 지하철은 신천역에 잠시 정차했다. "고객 민원으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그때 옆 차량에서는 주변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몇몇 어른들이 나서서 젊은 남자를 말리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사단이 난 분위기다. 신형차라 객차간 소음이 완전히 방음되어서 그 다툼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불편해 내가 있는 차량으로 사람들 몇몇이 들어올 때 들린 소리로는, 내 예상대로 한 노인과 청년간에 붙은 말싸움이었다. 청년은 우산을 든 손이 그를 향해 몇 번 삿대질하는 동안 손에 쥔 핸드폰으로 연거푸 뭔가를 써서 보내고 있었다. 정차하는 동안 공익요원이라도 투입되려나 했지만 열차는 1분 후 다시 잠실역으로 출발했다. 말싸움했던 노인은 잠실역에서 내리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섰고 청년은 그 자리에 서서 분을 삭히고 있었다. 
 

 

이 일이 일어난 오후, 나름 이른 시간에 영화 한 편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 작은 상영관이었지만 고전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라 빈 자리 없이 사람들이 그득히 들어섰다. 낮 시간이라 그런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많이 오셨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고 커피를 마시며 집중하려던 차, 신기하게도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자리 건너 양 옆으로 아주머니 둘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핸드폰 화면의 밝기는 스마트폰의 경우 스크린 화면만큼 밝다. 양쪽에서 그 큰 스크린을 최대밝기로 해두고 답신까지 한참동안 보내는 아주머니들. 너무하다 싶어 정중히 핸드폰을 꺼달라고 했다. 좀 놀랐던건 이 아주머니들이 남이야 뭔 소리를 하든 자기들 볼 일을 다 보고서야 핸드폰을 껐다는 것이다. 오른편 쪽의 아주머니는 영화 중반 즈음에 온 전화를 받고선 내일 12시 약속까지 다 잡았다. 

 

 
존중이 없는 사회다. 아니 존중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다. 무시를 당할까봐 먼저 남을 깔아 뭉개려 애를 쓰는 사람들이 점잖고 격식 갖춘 이들을 욕보이는게 일상다반사인 사회가 되었다.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이 자신들을 먼저 존중하지 않는다고 삿대질을 하고, 어린 사람들은 어쨌거나 존중받지 못할 걸 알기에 분노하며 저항한다. 노인들, 아줌마들 존중해봤자라며 분을 삭히지 못한다. 때로는, 내 눈으로 본 적은 아직 없지만, 역으로 어른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청년들도 있다. 무언가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적반하장으로 노발대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하는 사람들의 부류에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예전에는 노약자, 부녀자들이 곤란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엔 존중받는 것을 권리로 생각하여 다른 이의 신체적, 정신적 권리까지 불필요하게까지 침해하는 부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지하철에 일어났던 경우도 그런 쪽에 속한다. 먼 길을 걸어왔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꼬마 남매 둘이 노약자석에 앉아있었다. 사실 앉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옆 칸에서 꾀죄죄한 옷차림의 노인이 건너오더니 아이들이 앉은 걸 알면서도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여자아이는 놀래서 그 펑퍼짐한 엉덩이에 깔리지 않기 위해 부리나케 옆으로 비켜 앉았다. 누가 더 노약자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기 전에 자신보다 더 약한 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내어주는 자리가 노약자석이 아니었던가. 그 노인이 과연 너댓살 된 남매보다 힘들거나 지쳐보였던가. 아니었다. 소녀를 깔아 뭉개버릴 것 처럼 그렇게 말도 없이 궁둥이를 들이밀었어야 했는가. 아니었다. 두 남매의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양보를 가르칠 수도 있었던 좋은 순간을 그 노인은 그렇게 당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선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왜 이렇게 존중과 배려가 사라진 사회가 된 것일까. 그것은 내면의 궁핍함 때문이 아닐까. 그 궁핍함은 권력과 부와 명예로 채워지지 않는다. 오직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따스한 말 한 마디, 마음이 담긴 칭찬과 격려, 진심으로 하는 감사만이 그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한테 조차도 이런 존중의 말이 오고 가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하물며 모르는 사람에게서랴. 존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존중의 마음을 채울 자리에 언제 저 사람이 내게 뭔 짓을 할 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하며 불안해하는 마음을 채운다.  조금 전 그 무서운 일을 당했던 소녀의 겁에 질린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마 다시는 저 경로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나이든 어른들에 대한 두려움이 그 아이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으리라.

 

 

나도 그 소녀마냥 번번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당하고 오는 쪽이다. 되도록이면 참고 건너간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춰서 반응하고 대답한다. 열에 아홉은 그만한 예의를 갖춘 반응이 돌아온다. 그렇지 못한 하나가 끝까지 진상을 부리고 안하무인, 적반하장으로 달려든다. 아마 그들도 똑같은 식으로 당하고 창피해하고 마음이 힘들었던 경험이 많았으리라. 나는 그 끊이지 않는 분노와 증오의 꼬리를 내 선에서 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 성공한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도 간혹가다는 참지 말자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나도 열에 아홉이 아닌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내 악을 쓰는 그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의 가닥을 추스린다. 내 속에 항상 존중의 언어와 행동이 가득 차도록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다.
 
Posted by Cybercat